- 한 미국 병사의 한국전쟁 참전기 -
이 이야기는 한국 동란에 참전했던 한 미국 병사가 전쟁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쓴 글입니다.
나는 1950년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농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열일곱 살에 징집을 당했다.
보병 훈련을 받을 때 교관들이 했던 말은 "너희들 말 안 들으면 한국의 전쟁터로 보낼거야." 하면서 겁을 주곤 하면서 훈련을 시켰다.
그래서 한국전쟁으로 차출 당하지 않으려고 나는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훈련을 마치고 총기를 지급 받게 되었을 때 “저는 총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미국에는 본인이 총기를 받고 싶지 않다면 거부할 수 있는 법률이 있었다.
"나는 크리스챤 이기 때문에 적군일지라도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아서 죽일 수는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러면 위생병으로 복무하라."고 해서 다시 위생병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위생병 교육을 마치자마자, 나는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자라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데, 한국으로 가라고 하니 황당했다.
그래도 국가의 명령에 따라 배를 타고 일본으로 와서 그믐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한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인천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인천으로 상륙할 때 적의 눈에 들키면 안되니까 그믐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조수 간만의 차이가 작을 때까지 기다려서 한밤 중에 인천으로 상륙했다.
인천 바다에 내려 허리까지 차는 물속을 걸어서 맥아더 장군이 상륙했던 길과 똑같은 그 길을 따라서 인천에 상륙했다.
상륙하니 아... 그 지독한 냄새! 한국 땅에서는 논 밭에 뿌려진 똥 오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영등포에서의 주둔 생활이 끝난 후에 최전방으로 임무 교대가 되었는데, 위생병이기때문에 미군이나 한국군이 전투 중에 쓰러지면 그 곳으로 기어서 갔다.
북한군과 중공군이 계속 사격을 하면 미군이 엄호 사격을 해주었고 그 사이에 기어가서 환자를 어깨에 메고 일어서서 걸어 나오지 못하고 기어서 메고 돌아오는 생활을 계속했는데, 그 때부터 나의 뇌리 속에는 기억의 혼란과 망각 증상, 트라우마가 생기기 시작했다.
계속 사람들이 죽어가니까 그것을 볼 때는 정신이 이상해지고 오늘이 월요일인지 화요일인지 여름인지 겨울인지 그 감각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충실히 해야 된다는 생각만 가지고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쓰러지면 총탄 속을 기어가서 살펴보면, 머리가 부상 당한 사람, 팔 다리가 날아가고 없는 사람을 어깨에 메고 기어서 나오곤 했다.
영등포 지역에 주둔해서 복무했는데, 전방에서 후송되어 오는 팔다리가 끊어지고 다친 부상병들이 밀려 들었다.
당시 미군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 두 가지가 있었다.
1. 왜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싸워야 하느냐?
2. 그리고 왜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죽어야 하느냐?
모두 그런 질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맥아더 장군의 대답은 "우리의 위대한 국가, 미합중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왔다.
그리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사람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것이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의문은 계속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두가지 의문이 늘 미군들 사이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잠복근무 중이었는데, 중공군이 앞쪽에서 오고 있었고 숨소리가 나지 않게 미동도 없이 숨어 있었다.
다행히 나는 발견되지 않았고 그들은 그대로 지나갔다.
제일 힘든 것이 동상이었다. 영하 20-30도 되는 추위 속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되니까 그것이 큰 고통을 주었고 제일 힘들었다.
그 즈음에 나의 집에 전사 통지가 날아갔다.
사실은 옆 동료가 전사했는데 그의 신분증이 분실 되는 바람에 그 옆에 있던 나의 집으로 전사 통지서가 날아갔던 것이다.
집에서 부모님의 상심과 애도는 말할 수 없었고 닷새 후에 실수가 발견되어 "당신의 아들은 살아있고 다른 사람의 전사를 잘못 통보했다."고 다시 연락이 가게 되었다.
그래서 지역 신문에 "죽었던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대서 특필 되었다.
그 후 임무 교대가 되었고 제대하게 되었다.
새로운 임무 교대자로 위생병과 하사가 왔다.
새로 온 교대자가 그날 밤에 벙커 앞에서 보초를 섰는데, 추워서 졸고 있었을 때 북한군이 와서 죽이고 벙커 안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임무 교대 후 단 하루 차이로 새로 온 하사도 죽고 위생병도 죽었다.
그 후 제대해서 미국으로 돌아와 집으로 갔는데, 그때부터 KOREA라는 K자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고 누가 물어도
"한국이란 말은 하지마... 하지마..." 하고 말했다.
누가 한국 이야기를 좀 해 달라고 해도 신경이 견딜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서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멕시코로 하와이로 여행을 시키고 한국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도록 도와주었는데도 마음속의 상처는 해소가 되지 않았다.
트라우마 고통 속에서 계속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여자를 사귀게 하면 어떨까 하고 집안에서 논의되었고 마침 나는 어떤 여자와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그러나 다행히 나의 부인은 선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기 남편을 보니까 전쟁의 불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계속 피하고 피하는 것 만으로는 안되겠구나, 정면으로 돌파해야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에게 물었다.
"당신이 처음 징집 되었을 때가 몇 살이었죠?"
"열 일곱살 이었어..."
"무슨 훈련을 받았어요?"
"보병 훈련과 위생병 교육..."
얼마간 자세하게 조금씩 조금씩 묻기 시작하고 이야기를 듣고는 위로해 주고, "당신 참 큰일 했네요... 훌륭한 일 했다."고 칭찬도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트라우마는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나에게 "책을 하나 써 보자, 당신의 이력이 담긴 자서전을 하나 써 보자." 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이구 한국은 생각하기도 싫어, 하지마 하지마..." 라고 말했다.
그래도 부인이 자꾸만 자꾸만 나의 기억들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망각되었던 기억이 하나씩 하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때 마침 한국에서 일하던 친구로부터 "한국에 한번 와서 보라. 지금 한국은 많이 변했다. 아주 좋은 나라가 되어 있다." 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것이 1983년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오라고 하니까 "한번 가자, 가보자." 하고 마침내 나는 용기를 얻어서 불안한 마음이었지만 한번 오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보니까 그렇게 파괴되었던 나라가 번창해 있어서 그 발전된 모습을 보고 많이 울었다.
내가 미군으로 한국에 와서 싸웠을 때 "왜 내가 이 땅에 와서 싸워야 되느냐? 무엇을 위해 싸우느냐?"에 대한 해답이 이제야 풀리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이들을 위해서 내가 이 땅에서 싸웠구나..." 하고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의문과 트라우마가 조금씩 조금씩 풀리고 치유되기 시작했다.
어느 시골을 방문해 사람들을 만나보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 중에서 "잠간 만요" 하고 방에 들어가서 종이를 가지고 나와 "여기에 싸인 좀 해주세요..." 했는데, 싸인을 하면서 나는 그만 울어버렸다.
"이들를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와서 싸웠구나." 하고 생각했다.
서울에 다시 갔을 때 거리에서 한 택시 운전사가 내 앞에 서더니 "혹시 한국전쟁에서 싸운 참전 용사입니까?" 하고 물어서 "그렇다."고 하니까, “타십시오 너무 감사합니다. 어디든지 원하시는 곳에 모시고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인천으로 가봅시다." 라고 말했고 인천까지 가서 "바닷가로 가봅시다." 하고, 바닷가에 가서 “잠깐 스톱” 하라고 했다.
내 부인에게도 친구에게도 “미안하지만 여기 좀 남아있으라. 여기서 부터는 혼자 가고 싶다.”고 말한 후 오래 전 한밤 중 그믐 날에 인천 상륙작전을 폈던 그 바닷가로 가서 그냥 엉엉 울었다.
"내가 이들을 위해서 이곳에 와서 싸워 구나"
(펌)
우리가 이렇게 생명 내걸고 생명 바쳐가며 우리나라를 구해준 6.25 참전국과 병사들에게 감사가 참 부족했음을 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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