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미학
‘노인과 바다’는 작지만 위대한 작품이다. 내가 되풀이 읽은 서구문학을 들라면 ‘이방인’ ‘노인과 바다’ 등.... 비교적 부담 없이 펼칠 수 있는 길지 않은 작품들이다. 현대의 고전이 다 그렇듯 ‘기승전결’의 틀에서 벗어난 구도는, 책갈피 어딜 열어, 토막토막 읽어도 젊은 시절을 물들였던 기억의 풍경들이 낯설게 되살아 다가온다.
서울에서 훌쩍 날아온 손자손녀와 짧은 여행을 떠나면서, 책 두어 권을 챙긴다. 열 살 안팎의 녀석들은 까르르 잘 웃는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다’는 투다. 구김살이 안 보인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별들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호수가 왜 이렇게 크고 넓어요, 할아버지?”
바다인지 호수인지 헷갈린다며 입을 딱 벌리고 놀라던 녀석들은, 시차 때문인지, 스르르 소파에 묻혀 잠이 든다. 잠든 얼굴에도 엷은 웃음이 묻어있다.
햇볕이 쏟아지는 오후, 애들은 잠에 곤히 빠졌고, 나는 바다를 닮은 호수를 내다보면서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을 만난다. 다들 아는 빤한 내용이지만, 나는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내려 간다.
헤밍웨이 후기문학은 대개의 경우‘종교는 없어도 일종의 도덕률만은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강인한 성격의 주인공’들이다. 헤밍웨이 문학의 최대의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노인과 바다)’ 역시 그런 성격의 소유자다.
산티아고 노인은 외롭게 사는 어부. 그의 유일한 친구는 동네 꼬마 마놀린. 마놀린은 밤마다 눈이 잘 안 보이는 노인의 고기잡이 도구를 손질해주고, 음식도 가져다준다.
노인은 어부들의 꿈인 거대한 물고기를 잡기 위해 먼 바다로 혼자 떠난다. 84일 동안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85일째 되던 날 오후 노인의 낚시에는 믿을 수 없는 대어 말린(marlin·청새치)이 걸린다. 그는 낚시를 빠져나가려는 대어와 오랜 싸움을 시작한다.
3일간의 사투 끝에 대어를 제압하고 노인은 고기를 매달고 마을로 향한다. 하지만 부푼 꿈도 잠시, 대어의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가 달려든다. 노인은 마지막 힘까지 다해 상어들과 싸운다. 말 그대로의 혈투다. 이 과정에서 노인은 말한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진 않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어(A 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not defeated).”
너무 유명한 말이고 이 작품의 테마다. 인간의 위대한 신념과 고독한 투쟁, 불패의 인간성, 고통을 참고 위대함을 성취한 스토이시즘의 인간 상징 등등으로 작품의 테마는 해석된다.
그러나 오늘 나는 색다른 기막힌 대목을 발견한다.
노인은 뼈만 남은 대어 말린을 배에 매단 채 빈손으로 돌아온다. 얼마 후 집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마놀린 소년이 발견한다.
노인은 소년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말을 한다. 아주 편한 마음으로.
“패배하고 나면 모든 게 쉬워져(They beat me. They truly beat me).”
노인은 패배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패배한 순간 그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편안해졌다. 노인은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진정한 승자가 된다.
나는 ‘패배의 미학’이란 프리즘을 통해 산티아고 노인의 삶을 본다.
잠에서 깨어난 손자손녀에게 바다를 닮은 호수를 내다보면서 ‘노인과 바다’ 이야기를 들려준다.
홍기만 칼럼니스트
한국일보 발행일 : 2011.07.26